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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시를 짓는 뜻 (옮겨온글)

왕토끼 (秋岩) 2010. 11. 2. 22:13

월간문화재사랑
임금이 시를 짓는 뜻
2010-09-16 오전 11:29




어필과 어제

규장각이나 장서각 등 조선 왕실의 문헌을 소장하고 있는 기관에 상당히 많이 남아 있는 자료 중 하나가 이른바 어필御筆 혹은 어제御製이다. 어필은 임금이 쓴 글씨이고 어제는 임금이 지은 글을 가리킨다. 조선시대 임금은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사대부이기에, 여느 사대부보다 더 나은 시를 지을 수 있는 교양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임금이 시를 짓는 일이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제왕학帝王學의 교과서라 할 진덕수陳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에 나라를 망하게 한 임금들은 모두 신하와 더불어 문학을 즐겼기 때문이라 명시하고 있다. 세종 2년(1420) 《대학연의》를 인쇄할 활자를 주조한 것으로 보아 개국 초기부터 대부분의 임금이나 신하들에게 이 책은 필독서였을 것이다. 특히 유학을 중시한 문인들은 이 책에 근거하여 임금이 시를 짓거나 신하들과 시를 주고받는 일을 끊임없이 비판하였다. 그런데도 조선시대 임금들은 시를 많이 지었다. 1776년 간행된 『열성어제列聖御製』에는 세조의 시가 59편, 성종의 시가 204편, 선조의 시가 63편, 효종의 시가 103편, 숙종의 시가 816편, 영조의 시가 831편 수록되어 있다. 또 학문과 문학을 사랑하여 사대부적 교양까지 겸비한 정조는 438수의 한시를 남기고 있다. 왜 임금은 신하들의 비판을 감내하면서 시를 지었는가?
 

정문일침의 경계

대부분 명필이었던 역대 조선의 임금 중에서도 특히 글씨가 뛰어났던 선조의 어필로 된 어제부터 한 수 보기로 한다.

고운 복사꽃은 꽃 한 송이가

두세 가지 빛깔로 변환하네.

식물도 오히려 이와 같은 법

인심은 번복이 당연한 것이라네.

夭桃一朶花 變幻二三色

植物尙如玆 人心宜反覆

선조가 궁궐의 후원에 핀 삼색도三色桃를 보고 지은 작품이다. 삼색도는 꽃의 색깔이 차츰 변하여 세 가지 빛을 띠는 희귀한 복숭아나무다. 궁궐이나 귀족들의 집에나 있었던 이 귀한 삼색도를 보고 조선시대 많은 시인들이 시를 지었지만 대부분 그 아름다움을 노래한 데 반해 선조는 꽃의 색깔이 세 가지로 변화하는 것을 보고 두보杜甫가 <가난한 벗의 사귐貧交行>에서 이른 것처럼 손을 뒤집어 구름을 만들고 손을 엎어서 비를 만드는 번복을 일삼는 인정세태를 떠올렸다. 선조가 왜 이런 시를 지었을까? 이 시는 《선조실록》에도 실려 있다. 대사간으로 있던 이발李潑이 조정의 논의가 자신의 뜻과 같지 못한 것을 불만으로 삼아 사직하려고 하자, 선조는 이를 허락하지 않으면서 신하는 번복하는 작태가 있어서는 아니 된다고 하면서 벼슬살이에 변덕이 심한 신하를 풍자하기 위하여 이 시를 썼다고 하였다. 그러니 이 시를 특히 목판에 새기고 인쇄하여 널리 배포한 이유는 자명하다. 장광설로 물러나는 신하를 붙잡으려 들기보다 정문일침의 시로 신하의 변심을 막고자 한 것이다.


시로 보인 권력의 뜻

아무리 임금일지라도 개인적인 정감을 자연스럽게 읊조리는 시를 짓지 않은 것은 아니겠지만, 고금에 통치권자의 일거수일투족이 늘 큰 의미를 갖고 해석되듯이, 임금의 시는 개인의 서정을 넘어 하나의 통치 행위로 간주된다. 조선이 개국하면서 내세운 우문흥학右文興學의 이념을 위해서 임금의 한시는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단적인 예로, 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세조는 유학을 흥기하기 위해서 시를 이용하였다. 세조는 문과文科 시험을 치르면서 성균관을 소재로 한 시 5편을 직접 지어 내리고 응시자에게 제각기 좋아하는 형식으로 이와 관련한 글을 지어 답하게 함으로써 유학의 흥기를 도모하였다. 역대 임금은 이처럼 스스로 시를 지어 신하나 유생들로 하여금 학문에 힘쓰도록 하였다. 숙종의 다음 작품 역시 이러한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사람이 지혜를 기르려면 배움이 가장 중요한 법

옥의 문채를 찾으려면 꼭 절차탁마가 필요하다네.

경서의 깊은 뜻을 누구에게 물어야 하겠는가?

사부 가까이하여 자주 묻기를 좋아해야 한다네.

使人長智莫如學 若玉求文必待琢

經書奧旨于誰問 師傅宜親不厭數

숙종이 1715년 11월 4일 여섯 번째 아들 연령군延齡君에게 내린 한시다. 지혜를 기르는 데 배움이 가장 중요한 방법이니, 마치 아름다운 옥을 만들려면 절차탁마가 필요한 것과 같은 이치다. 이를 위해 스승을 늘 가까이 하여 자주 물어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임금이라 하여 다르지 않으리니, 어린 자식에게 자상한 마음으로 학문에 힘쓸 것을 시로 대신한 것이다. 그런데 이 시 역시 조선시대 목판으로 인쇄되어 배포되었다. 이때에는 숙종이 친자식 연령군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임금의 자식인 신하나 유생을 향한 권학勸學의 윤음인 셈이다.


통치술로서의 어제시

사극에도 흔하게 볼 수 있듯 조선시대 대궐에는 연회가 잦았다. 전적으로 유흥을 목적으로 한 것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궁중의 연회도 대부분 통치술의 일환이요, 이 때 임금의 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조선시대 국가의 공식적인 연회에서 임금과 신하가 시를 주고받는 것은 상하의 소통을 위한 것이었다. 세조는 젊은 시절 활갑에 새긴 시를 훗날 왕위에 오른 후 연회 자리에서 신하들에게 써서 내렸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문학을 좋아하지 않지만 군신의 예의에 막혀 상하의 정이 통하지 않을까 우려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조선 후기 영조와 정조도 한시를 통치술의 일환으로 활용하였다. 영조는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시점부터 관직에 임명하는 자리에서 술과 함께 어제시를 내리고 이에 화답하게 함으로써 어제라는 광영을 통하여 상하의 정을 돈독하게 하고자 하였다. 이와 함께 영조는 신하들이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강개한 심정을 담은 시를 지어 신하들에게 보여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 탕평蕩平의 뜻을 전달할 때에도 시를 신하들에게 내렸다.  

강한 신하들의 견제를 받으면서 왕위에 오른 정조는 자신을 지지하던 신하들과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하여 한시를 적극 이용하였다. 정조 때의 성사로 기록되고 있는 『태학은배시집太學恩杯詩集』이 바로 이러한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이 책은 정조가 1798년 12월 10일 성균관에 나아가 시험을 보이고 『시경』의 <녹명鹿鳴>에 나오는 “나에게 좋은 손님이 있네我有嘉賓”라는 구절을 은배銀杯에 써서 하사하고 어제를 내렸는데 이에 249명의 성균관 유생과 33명의 신하들이 지어 올린 시문을 엮은 것이다. 신하들에게 술잔을 내리는 전통은 태종 때 비롯하였는데, 세종이 백준화종白樽畵鍾이라는 이름의 술잔을 하사하자 신하들이 다투어 시를 지어 그 사실을 노래하면서 본격적인 관례가 되었다. 또 효종이 성균관 유생이 올린 시문에 답하여 은배 둘을 하사한 바 있다. 이러한 고사를 이어 자신의 체취가 묻은 술잔에 임금과 신하의 소통을 상징하는 시 <녹명>을 새겨 하사하였다.
이와 함께 정조는 연구聯句라고 하는 특수한 한시를 상하의 소통과 결집을 위하여 자주 이용하였다. 연구는 한나라 때 무제武帝가 백량대柏粱臺에서 신하들과 어울려 한 편의 한시를 공동으로 지은 데서 유래한다. 신하가 임금과 함께 시를 지어 한편의 공동작을 완성한다는 것은 엄청난 영광이니, 신하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유도하는 데 더 이상 좋은 것이 있겠는가?   


글·이종묵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사진제공·고려대박물관, 규장각한국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