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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化解說 속의 民畵 (옮겨온글)

왕토끼 (秋岩) 2010. 9. 16. 07:51

  文化解說 속의 民畵  

산수화 (山水畵)

  산수화는 민화의 주된 소재로서 인간의 자연에 대한 친화력과 자연과 함께하는 삶의 본질을 발견하게 하며 자연이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겸허하게 친구로 살아갈 것을 권유하고 있는 그림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동의 금강산, 서의 묘향산, 남의 지리산, 북의 백두산과 한양이 위치한 중앙의 삼각산등을 오대명산으로 신성시하여 설화나 그림으로 많이 묘사하였다.

조선후기에 민화에서 산수화가 발전된 것은 겸재 정선(1676 ~ 1759) 의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민화 산수화는 풍경의 사실성 보다는 풍경이 지니고 있는 상징성이 훨씬 과장되게 표현되어 있다. 이는 곧 이상화된 세계를 구사하고 있는 정통 산수화와는 달리 현실적인 삶의 모습을 토대로 하여 그들이 품고 있는 정신적인 염원을 자유분방하게 담고 있다 하겠다.

  민화산수화에는 금강산, 관동팔경 등 우리 산천을 소재로 한 것과 무이구곡, 소상팔경과 같이 중국 산수를 배경으로 한 것이 있는데, 보통 8폭이나 10폭 병풍으로 꾸며서 객실이나 사랑방을 장식했다.


금강산도 (金剛山圖)

 민화 산수화의 대표적인 소재인 금강산은 여름에는 봉래산, 가을에는 풍악산, 겨울에는 개골산이라는 별명이 있는데 금강산도는 실경을 그리되 추상적으로 변형시켜 파격적인 구도를 취하며 봉우리와 기암괴석을 추상성이 가미된 반복적 선묘로 의인화 시키고 네모꼴이나 직선등 기하학적인 조형을 중첩하기도 하며 불꽃 모양으로 표현하는 등 다채로운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봉우리나 사찰, 암자 등의 그림 위에 그 이름을 하나하나 기록하기도 한다.


● 관동팔경도 (關東八景圖)

  관동팔경도는 강원도 동해안을 따라 펼쳐진 통천 총석정, 고성 삼일포, 간성 청간정, 양양 낙산사, 강릉 경포대, 삼척 죽서루, 울진 망양정, 평해 월송정 등 경치가 뛰어난 여덟 군데의 명승지를 그린 그림으로서 화면 곳곳에 각 명승지의 이름을 써 넣은 것이 특징이다.

아름다운 경치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여유로운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독특한 그림이다.


● 소상팔경도 (瀟湘八景圖)

  소상팔경도란 중국 호남성 동정호의 남쪽 영릉(零陵)부근, 즉 소수(瀟水)와 상수(湘水)가 합쳐지는 곳의 여덟 가지 경치를 주제로 삼아 그린 그림이다. 그 여덟 경치 주제를 살펴보면 소상야우(瀟湘夜雨 - 소상강에 내리는 밤비), 원포귀범(遠浦歸帆 -  먼 포구로 돌아오는 배), 동정추월(洞庭秋月 - 동정호에 비치는 가을 달), 평사낙안(平沙落雁 - 모래밭에 내려앉은 기러기), 어촌낙조(漁村落照 - 저녁노을 물든 어촌), 강천모설 (江天暮雪 - 저녁때 산야에 내린 눈), 산시청람(山市晴嵐 - 푸르스름하고 흐릿한 기운이 감도는 산간마을), 연사만종(煙寺晩鐘 - 연무에 싸인 산사의 종소리가 들리는 늦저녁 풍경) 등이다

소상팔경도는 원풍(元豊) 1년 (1078년) 송(宋)나라 송적(宋迪)이 처음 팔경도를 그렸고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명종(1170 ~1197)의 어명으로 이광필이 소상팔경도를 그렸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보인다. 소상 팔경도는 주로 사랑방이나 기방(기생방)을 장식했던 그림인데 소상팔경도가 기방에 많이 놓이게 된 이유는 「요임금의 딸이자 순임금의 두 왕비였던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순임금이 창오의 들에서 죽어 구의산에 묻혔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상수에 몸을 던졌고, 이때 이비(二妃)의 피눈물이 군산 대나무에 튀어 소상반죽(瀟湘斑竹)이 되었다」는 슬픈 사연을 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무이구곡도 (武夷九谷圖)

  무이구곡도는 중국 복건성 무이산 계곡의 아홉 절경을 그린 그림이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주자)가 1183년 54세때 무이산에 무이정사를 짓고 이듬해 아홉 편의 칠언절구를 지었는데, 그것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 무이구곡도이다. 무이구곡도는 일반 민화와는 달리 극채색을 쓰지 않고 대개 선묘로 그림을 그리는 특징이 있다.  

 

사당도 (祠堂圖)

  조선시대 사람들은 유교의 영향으로 부모님 살아  생전에 효도하고 돌아가신 후에는 양지 바른 명당에 모셔 놓고 묘역 안에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는 일이 자식 된 도리로써 후손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겼다.

  사당도는 「마치 옆에 모신 듯이 돌아가신 선조를 사모하는 그림」이라는 뜻의 감모여재도(感慕如在圖)라고도 하는데, 이 사당그림은 조상의 묘소가 멀리 떨어져 있거나 사당이 없는 집안의 가난한 후손들이 제사 때 사용하던 그림으로 이동식 사당인 셈이었다. 곧 제사를 지낼 때 지방을 만들어 사당 그림 중앙의 위폐를 그린 곳에 직접 붙이고 썼던 그림이다.

사당 그림은 많은 서민들이 현실적으로 사당을 가질 수 없자 지혜를 발휘해서 조상에 대한 효를 표현한 서민들의 애환이 가장 많이 깃든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물화 (人物畵)

  민화에서 인물화는 인간을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화폭에 옮겨 놓고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그림으로 주로 방안 장식용으로 사용되었다

인물화에는 어린이를 소재로 한 백동자도(百童子圖)를 비롯하여 소설이나 고사, 설화의 주인공을 상상해서 그린 작품과 매우 섬세하게 그린 초상화나 자화상등이 있다.

특히 조선시대 초상화는 얼굴의 주름이나 수염 한 올 한 올 뿐만 아니라 검버섯까지도 매우 사실적으로 그린 격조 높은 우수 작품들이 많이 있는데 대상이 살아 있을 때 그리는 사진(寫眞)혹은 진영(眞影)과 사후에 그리는 전신도(傳神圖)가 있다.

그리고 초상화에 비해 매우 적은 작품이 전해지고 있는 자화상 가운데 걸작중의 걸작으로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였던 공재 윤도서의 자화상을 꼽을 수 있는데 이 작품은 수염 한올한올 까지도 정밀하게 묘사하고 있어「인간의 실존 밑바닥까지 다가가는 듯한 실존성을 느끼게 하는 작품」으로 평가 되고 있다. 

 

 

산신도(山神圖)

  산신도가 우리나라의 사찰이나 사당 등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경 도교가 우리나라에 전파되면서 부터로 알려져 있는데 호랑이와 산신을 숭배하던 우리 선조들의 산악숭배 신앙이 반영된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산신도는 대개 노인 모습의 산신과 호랑이를 함께 그리고 있는데 행복과 재물을 가져다주며 무병장수하게 하는 영험한 신이라 해서 무당개인의 사당이나 마을의 산신당 또는 사찰의 산신각에 독성도나 칠성도와 함께 모셔졌었다.


독성도(獨聖圖)

  독성(獨聖)은 불교적으로는 부처님의 도움 없이 부처님 생전에 홀로 깨친 성자라는 뜻으로 독성도는 부처님의 18 나한중의 한 분이었던 빈두로 존자나 천태산에서 독수 선정하여 진리를 깨우치고 미륵불이 출현하는 융화세계를 기다리고 있다는 전설적인 존재인 나반존자를 그린 중국 그림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독성도에서 독성은 항상 머리가 벗어진 노인이나 정수리가 튀어나온 노인으로 그려지는데 흰 눈썹에 승복을 입고 있는 차림새로 염주나 나무 지팡이를 들고 있는 맨발의 모습이다.

독성도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일을 독성이 알고 있어서 우리 중생들을 늘 이롭게 이끌고 복을 내려 준다하여 사찰이나 마을의 산신당 등에 걸렸던 그림이다.


칠성신도(七星神圖)

  칠성신도에서 칠성신은 북두칠성을 신격화 한 것으로서 대개가 일곱 명의 노인을 그리는데 칠성은 자식을 잉태하게 하며 인간의 수명을 길게 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거처를 지켜 준다하여 사찰이나 사당 등에 모셔졌던 그림이다.


신선도(神仙圖)

  신선도는 중국의 전국시대 말기에 생긴 불로장생(不老長生)사상과 도교에서 비롯된 신선사상을 그림화한 것으로서, 그 관념의 기초가 인간에 있기 때문에 그림에 표현된 신선들은 우리 인간의 모습이며 신선과 더불어 불로장생의 상징물인 불로초, 천도복숭아, 불수과 등과 사슴이나 학, 거북등이 함께 그려진다.

  신선도는 불로장생과 부귀에 대한 속인들의 한없는 염원과 부러움을 신선이라는 신앙적 존재를 통해 나타낸 부귀와 장수를 기원하는 그림으로서 주로 노인들의 방을 장식했던 그림이다.


신선동자도 (神仙童子圖)

  다른 신선도처럼 불로장생과 부귀에 대한 속인들의 한없는 염원과 부러움을 신선이라는 신적인 존재를 통해서 나타낸 그림이다.

수성노인과 함께 그려진 천도복숭아는 선도(仙桃)라고도 하는데 이는 3천년 만에 꽃이 피고 3천년이 지나야 열매를 맺으며 3천년이 가야 익는다는 상상의 과일로서 장수를 상징한다. 그래서 신선동자도는 부귀와 장수를 기원하는 그림이다.



● 바리공주(애기씨) 그림

  바리공주 그림은 감로수와 피, 살, 목숨을 살리는 꽃을 얻어서 부모의 생명을 구하는 바리데기 설화의 주인공인 바리공주를 신격화해서 그린그림으로 일명 「애기씨」라고도 한다. 이 그림은 사람이 죽은 지 49일안에 영혼천도를 위해 후손들이 베푸는 씻김굿(지노귀 새남)을 할때 무녀의 사당에 모셔졌던 그림이다.

  바리공주 설화 내용을 참고로 소개 하면 「바리공주는 불라국 오구대 왕의 일곱 번째 딸이었다. 아들을 늘 바라던 오구대왕은 딸을 낳자 버린다는 뜻의 「바리」라는 이름을 붙여 갓난 딸을 물에 띄워 보냈는데, 착한 늙은 부부가 거두어 키웠다. 이후 대왕이 병이 들어 점을 치니, 바리공주가 저승에서 구해오는 불사약을 먹어야 나을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를 안 바리공주는 수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역경을 헤치고 저승으로 들어가 꽃을 구해 돌아와 죽은 아비를 살려 냈다」 한다. 이후에 바리공주는 스스로 무당이 되었다 해서 무당들의 수호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중국고대 전설에 나오는 수호신(守護神)적인 상상의 동물을 영수(?獸)라하여 이들을 그린 그림이 영수화이다. 민화에 나타나는 영수들은 길상적인 서수(瑞獸)들로 수호와 축사(逐邪)의 뜻을 가진 것이다.

  영수를 소재로 한 사신도(四神圖)는 동양 전통 철학인 음향오행설에서 비롯되었으며 동서남북 네 방향을 수호하는 청용, 백호, 주작, 현무를 그린 그림이다. 또한 민화에 등장하는 영수들로는 용, 봉황, 신구, 기린등 사영수(四?獸)와 해태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용(龍)

  용은 우리 겨fp와 가장 친근한 상상의 동물로서 그 생김새는 몸통이 뱀과 같고 네 개의 발이 있어 매의 발톱을 가졌으며 머리에는 사슴 같은 뿔과 등에는 81개의 비늘이 있고 토끼같은 눈, 소의 귀, 뱀 큰 조개 같은 모습의 배를 가졌다고 한다.

백룡과 황룡은 임금, 황제를 상징하고 청룡은 사악한 귀신을 내쫓는 벽사를 뜻하며 흑룡, 여룡은 가뭄이들 때 기우제를 올려 비를 구하는 대상이었다.

  용은 전통적으로 고귀하고 신비로운 존재로 비유되어 왕의 얼굴을 용안(龍顔), 왕이 앉는 걸상을 용상(龍 왕의 의복을 용포(龍袍)라고 했는데 왕을 용으로 비유하게 된 사연은 용에게는 인간과 국가를 보호하고 물을 다스리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용을 그리는 방법에도 격식이 있어서 왕실에서 사용하는 용 그림은 발톱이 다섯 개인 오조룡(五爪龍)을 그리고 민가에서는 사조룡(四爪龍)이나 삼조룡(三爪龍)을 그렸다

또 왕과 왕비의 예장에는 오조룡을 수놓은 둥근 보(補)를 착용했고, 왕세자와 세자빈을 사조룡, 세자손을 발톱이 세 개인 삼조룡을 수놓은 보를 착용해서 발톱의 수로 위계를 달리 표현하기도 했다.


봉황 (鳳凰)

  봉황은 고대 중국의 전설로부터 유래된 서조(瑞鳥)로 어질고 현명한 성인과 함께 세상에 나타나는 새라고 전한다.

  수컷을 봉(鳳)이라고 하고 암컷을 황(凰)이라고 하는데 암수를 같이 불러 봉황이라 한다.

봉황의 생김새는 앞모습이 기러기(군신의 의), 뒷모습을 기린(어진성군), 부리는 닭(밝음을 가져옴), 턱은 제비(천심전달), 등은 거북(재앙을 막고 앞날 예견)을 닮았다고 한다.

용과 봉황은 군왕이 갖출 모든 조건을 갖추었다 하여 군왕을 상징해왔는데 두 상징에 서열을 매길 때는 용을 상위에 두어 천자 곧 황제의 상징으로 삼았고 봉황을 황후의 상징이나 천자에게 사대하는 제후나 왕의 상징으로 쓰였다. 그래서 천자를 섬기던 조선시대 왕궁의 정전 천장에 용을 그리지 못하고 봉황을 그렸었는데 조선시대 말기에 고종께서 청나라 사대에서 벗어나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왕에서 황제로 승격되면서 경복궁 근정전의 천장과 임금이 앉는 용상의 뒤에 봉황 그림이 황제의 상징인 용 그림으로 바뀌었다. 이는 창덕궁 인정전에 남아있는 봉황 그림과는 대조적인 좋은 예가 된다.

  봉황그림은 오동나무와 대나무등과 함께 그려지는데 그것은 봉황은 오동나무 아래에만 깃들고 삼천년 만에 한번 열린다는 대나무 열매인 죽실(竹實)을 먹고 산다 전하기 때문이다.


신구도(神龜圖)

  신구라 불리는 거북은 용, 봉황, 기린과 함께 사령수(四?獸)의 하나로 3천년을 산다고 전하여 장수의 상징으로 여겼다.

  등껍질은 하늘의 지붕을 나타내고 그 표면에는 별자리가 나타나 있으며 배의 껍질을 땅을 나타낸다고 한다. 곧 상하의 껍질은 천지 음양의 힘을 나타내 수명과 우주를 상징하는 것이다.

  민화에 보이는 거북은 예언과 수리의 기본이 되는 <하도낙서(河圖洛書)>를 등에 지고 나오기도 하고 복점을 치는 내용의 그림으로 그려지기도 하는데, 이는 중국 하나라 우임금이 낙수에서 홍수를 다스릴 때 등에 아홉 개의 점이 찍혀 있는 거북이 나타났고 이 점은 나중에 주역의 중심 사상인 팔괘가 만들어 졌기 때문이다.

  민화에서 거북은 우리가 볼 수 있는 일반 거북과는 달리 매우 기괴하게 상상적으로 그려지며 대개가 두 마리를 함께 그리고 있는데 우리 선조들은 거북을 장수의 상징으로서 귀엽고 친근한 동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린(麒麟)

  민화에서 기린은 우리가 동물원에서 볼 수 있는 기린이 아니고 털을 가진 땅 짐승의 왕으로서 수컷을「기(麒)」 암컷을「린(麟)」이라고 하는 상상의 동물이다. 기린은 몸이 사슴같이 크고 네다리는 소 발굽이고 목의 털인 갈기는 말과 같고 등 털의 빛깔은 오색이고 배의 털은 황색이라고 한다. 그리고 기린은 머리에 살로 된 뿔이 하나 돋아 있지만 사람을 받아도 다치지 않고 살아있는 풀이나 벌레를 밟지 않으며 왕이 될 사람이 출현할 때 사람들이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기린이 나타나면 세상에 어진 성왕(聖王)이 나와 태평성대를 펼 길조라 생각했다.

해태 그림

  해태는 소의 머리와 말의 얼굴에 외뿔이 하나 있는 상상의 동물로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줄 알며 불을 막아 준다고 한다.

  우리나라 국회의사당에 세워진 해태상은 국사를 논할 때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정의롭게 일하라는 의미라 하겠다. 또한 조선시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불이 자주 일어나자 당대 유명한 석공 이세욱을 시켜 돌로 해태 상을 만들어 세우고 불을 막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해태그림은 불을 막기 위하여 정초에 세화로 그려 부엌문에 붙였던 그림이다.


● 불가사리 그림

  불가사리는 쇠, 구리, 대나무 뿌리를 먹고 살며 악귀를 쫓는다는 전설속의 동물로 생심 새는 곰의 몸에 코끼리의 코, 코뿔소의 눈, 호랑이의 발 쇠톱 같은 이빨, 황소의 꼬리를 가졌으며 온몸에는 바늘 같은 털이나 있고 암컷에만 줄무늬가 나 있어 이것으로 암수가 구별 된다고 한다.                                                                                      -펌 編輯- 

산수화 (山水畵)

  산수화는 민화의 주된 소재로서 인간의 자연에 대한 친화력과 자연과 함께하는 삶의 본질을 발견하게 하며 자연이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겸허하게 친구로 살아갈 것을 권유하고 있는 그림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동의 금강산, 서의 묘향산, 남의 지리산, 북의 백두산과 한양이 위치한 중앙의 삼각산등을 오대명산으로 신성시하여 설화나 그림으로 많이 묘사하였다.

조선후기에 민화에서 산수화가 발전된 것은 겸재 정선(1676 ~ 1759) 의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민화 산수화는 풍경의 사실성 보다는 풍경이 지니고 있는 상징성이 훨씬 과장되게 표현되어 있다. 이는 곧 이상화된 세계를 구사하고 있는 정통 산수화와는 달리 현실적인 삶의 모습을 토대로 하여 그들이 품고 있는 정신적인 염원을 자유분방하게 담고 있다 하겠다.

  민화산수화에는 금강산, 관동팔경 등 우리 산천을 소재로 한 것과 무이구곡, 소상팔경과 같이 중국 산수를 배경으로 한 것이 있는데, 보통 8폭이나 10폭 병풍으로 꾸며서 객실이나 사랑방을 장식했다.


금강산도 (金剛山圖)

 민화 산수화의 대표적인 소재인 금강산은 여름에는 봉래산, 가을에는 풍악산, 겨울에는 개골산이라는 별명이 있는데 금강산도는 실경을 그리되 추상적으로 변형시켜 파격적인 구도를 취하며 봉우리와 기암괴석을 추상성이 가미된 반복적 선묘로 의인화 시키고 네모꼴이나 직선등 기하학적인 조형을 중첩하기도 하며 불꽃 모양으로 표현하는 등 다채로운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봉우리나 사찰, 암자 등의 그림 위에 그 이름을 하나하나 기록하기도 한다.


● 관동팔경도 (關東八景圖)

  관동팔경도는 강원도 동해안을 따라 펼쳐진 통천 총석정, 고성 삼일포, 간성 청간정, 양양 낙산사, 강릉 경포대, 삼척 죽서루, 울진 망양정, 평해 월송정 등 경치가 뛰어난 여덟 군데의 명승지를 그린 그림으로서 화면 곳곳에 각 명승지의 이름을 써 넣은 것이 특징이다.

아름다운 경치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여유로운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독특한 그림이다.


● 소상팔경도 (瀟湘八景圖)

  소상팔경도란 중국 호남성 동정호의 남쪽 영릉(零陵)부근, 즉 소수(瀟水)와 상수(湘水)가 합쳐지는 곳의 여덟 가지 경치를 주제로 삼아 그린 그림이다. 그 여덟 경치 주제를 살펴보면 소상야우(瀟湘夜雨 - 소상강에 내리는 밤비), 원포귀범(遠浦歸帆 -  먼 포구로 돌아오는 배), 동정추월(洞庭秋月 - 동정호에 비치는 가을 달), 평사낙안(平沙落雁 - 모래밭에 내려앉은 기러기), 어촌낙조(漁村落照 - 저녁노을 물든 어촌), 강천모설 (江天暮雪 - 저녁때 산야에 내린 눈), 산시청람(山市晴嵐 - 푸르스름하고 흐릿한 기운이 감도는 산간마을), 연사만종(煙寺晩鐘 - 연무에 싸인 산사의 종소리가 들리는 늦저녁 풍경) 등이다

소상팔경도는 원풍(元豊) 1년 (1078년) 송(宋)나라 송적(宋迪)이 처음 팔경도를 그렸고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명종(1170 ~1197)의 어명으로 이광필이 소상팔경도를 그렸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보인다. 소상 팔경도는 주로 사랑방이나 기방(기생방)을 장식했던 그림인데 소상팔경도가 기방에 많이 놓이게 된 이유는 「요임금의 딸이자 순임금의 두 왕비였던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순임금이 창오의 들에서 죽어 구의산에 묻혔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상수에 몸을 던졌고, 이때 이비(二妃)의 피눈물이 군산 대나무에 튀어 소상반죽(瀟湘斑竹)이 되었다」는 슬픈 사연을 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무이구곡도 (武夷九谷圖)

  무이구곡도는 중국 복건성 무이산 계곡의 아홉 절경을 그린 그림이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주자)가 1183년 54세때 무이산에 무이정사를 짓고 이듬해 아홉 편의 칠언절구를 지었는데, 그것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 무이구곡도이다. 무이구곡도는 일반 민화와는 달리 극채색을 쓰지 않고 대개 선묘로 그림을 그리는 특징이 있다.  

 

사당도 (祠堂圖)

  조선시대 사람들은 유교의 영향으로 부모님 살아  생전에 효도하고 돌아가신 후에는 양지 바른 명당에 모셔 놓고 묘역 안에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는 일이 자식 된 도리로써 후손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겼다.

  사당도는 「마치 옆에 모신 듯이 돌아가신 선조를 사모하는 그림」이라는 뜻의 감모여재도(感慕如在圖)라고도 하는데, 이 사당그림은 조상의 묘소가 멀리 떨어져 있거나 사당이 없는 집안의 가난한 후손들이 제사 때 사용하던 그림으로 이동식 사당인 셈이었다. 곧 제사를 지낼 때 지방을 만들어 사당 그림 중앙의 위폐를 그린 곳에 직접 붙이고 썼던 그림이다.

사당 그림은 많은 서민들이 현실적으로 사당을 가질 수 없자 지혜를 발휘해서 조상에 대한 효를 표현한 서민들의 애환이 가장 많이 깃든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물화 (人物畵)

  민화에서 인물화는 인간을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화폭에 옮겨 놓고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그림으로 주로 방안 장식용으로 사용되었다

인물화에는 어린이를 소재로 한 백동자도(百童子圖)를 비롯하여 소설이나 고사, 설화의 주인공을 상상해서 그린 작품과 매우 섬세하게 그린 초상화나 자화상등이 있다.

특히 조선시대 초상화는 얼굴의 주름이나 수염 한 올 한 올 뿐만 아니라 검버섯까지도 매우 사실적으로 그린 격조 높은 우수 작품들이 많이 있는데 대상이 살아 있을 때 그리는 사진(寫眞)혹은 진영(眞影)과 사후에 그리는 전신도(傳神圖)가 있다.

그리고 초상화에 비해 매우 적은 작품이 전해지고 있는 자화상 가운데 걸작중의 걸작으로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였던 공재 윤도서의 자화상을 꼽을 수 있는데 이 작품은 수염 한올한올 까지도 정밀하게 묘사하고 있어「인간의 실존 밑바닥까지 다가가는 듯한 실존성을 느끼게 하는 작품」으로 평가 되고 있다. 

 

 

산신도(山神圖)

  산신도가 우리나라의 사찰이나 사당 등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경 도교가 우리나라에 전파되면서 부터로 알려져 있는데 호랑이와 산신을 숭배하던 우리 선조들의 산악숭배 신앙이 반영된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산신도는 대개 노인 모습의 산신과 호랑이를 함께 그리고 있는데 행복과 재물을 가져다주며 무병장수하게 하는 영험한 신이라 해서 무당개인의 사당이나 마을의 산신당 또는 사찰의 산신각에 독성도나 칠성도와 함께 모셔졌었다.


독성도(獨聖圖)

  독성(獨聖)은 불교적으로는 부처님의 도움 없이 부처님 생전에 홀로 깨친 성자라는 뜻으로 독성도는 부처님의 18 나한중의 한 분이었던 빈두로 존자나 천태산에서 독수 선정하여 진리를 깨우치고 미륵불이 출현하는 융화세계를 기다리고 있다는 전설적인 존재인 나반존자를 그린 중국 그림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독성도에서 독성은 항상 머리가 벗어진 노인이나 정수리가 튀어나온 노인으로 그려지는데 흰 눈썹에 승복을 입고 있는 차림새로 염주나 나무 지팡이를 들고 있는 맨발의 모습이다.

독성도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일을 독성이 알고 있어서 우리 중생들을 늘 이롭게 이끌고 복을 내려 준다하여 사찰이나 마을의 산신당 등에 걸렸던 그림이다.


칠성신도(七星神圖)

  칠성신도에서 칠성신은 북두칠성을 신격화 한 것으로서 대개가 일곱 명의 노인을 그리는데 칠성은 자식을 잉태하게 하며 인간의 수명을 길게 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거처를 지켜 준다하여 사찰이나 사당 등에 모셔졌던 그림이다.


신선도(神仙圖)

  신선도는 중국의 전국시대 말기에 생긴 불로장생(不老長生)사상과 도교에서 비롯된 신선사상을 그림화한 것으로서, 그 관념의 기초가 인간에 있기 때문에 그림에 표현된 신선들은 우리 인간의 모습이며 신선과 더불어 불로장생의 상징물인 불로초, 천도복숭아, 불수과 등과 사슴이나 학, 거북등이 함께 그려진다.

  신선도는 불로장생과 부귀에 대한 속인들의 한없는 염원과 부러움을 신선이라는 신앙적 존재를 통해 나타낸 부귀와 장수를 기원하는 그림으로서 주로 노인들의 방을 장식했던 그림이다.


신선동자도 (神仙童子圖)

  다른 신선도처럼 불로장생과 부귀에 대한 속인들의 한없는 염원과 부러움을 신선이라는 신적인 존재를 통해서 나타낸 그림이다.

수성노인과 함께 그려진 천도복숭아는 선도(仙桃)라고도 하는데 이는 3천년 만에 꽃이 피고 3천년이 지나야 열매를 맺으며 3천년이 가야 익는다는 상상의 과일로서 장수를 상징한다. 그래서 신선동자도는 부귀와 장수를 기원하는 그림이다.



● 바리공주(애기씨) 그림

  바리공주 그림은 감로수와 피, 살, 목숨을 살리는 꽃을 얻어서 부모의 생명을 구하는 바리데기 설화의 주인공인 바리공주를 신격화해서 그린그림으로 일명 「애기씨」라고도 한다. 이 그림은 사람이 죽은 지 49일안에 영혼천도를 위해 후손들이 베푸는 씻김굿(지노귀 새남)을 할때 무녀의 사당에 모셔졌던 그림이다.

  바리공주 설화 내용을 참고로 소개 하면 「바리공주는 불라국 오구대 왕의 일곱 번째 딸이었다. 아들을 늘 바라던 오구대왕은 딸을 낳자 버린다는 뜻의 「바리」라는 이름을 붙여 갓난 딸을 물에 띄워 보냈는데, 착한 늙은 부부가 거두어 키웠다. 이후 대왕이 병이 들어 점을 치니, 바리공주가 저승에서 구해오는 불사약을 먹어야 나을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를 안 바리공주는 수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역경을 헤치고 저승으로 들어가 꽃을 구해 돌아와 죽은 아비를 살려 냈다」 한다. 이후에 바리공주는 스스로 무당이 되었다 해서 무당들의 수호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중국고대 전설에 나오는 수호신(守護神)적인 상상의 동물을 영수(?獸)라하여 이들을 그린 그림이 영수화이다. 민화에 나타나는 영수들은 길상적인 서수(瑞獸)들로 수호와 축사(逐邪)의 뜻을 가진 것이다.

  영수를 소재로 한 사신도(四神圖)는 동양 전통 철학인 음향오행설에서 비롯되었으며 동서남북 네 방향을 수호하는 청용, 백호, 주작, 현무를 그린 그림이다. 또한 민화에 등장하는 영수들로는 용, 봉황, 신구, 기린등 사영수(四?獸)와 해태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용(龍)

  용은 우리 겨fp와 가장 친근한 상상의 동물로서 그 생김새는 몸통이 뱀과 같고 네 개의 발이 있어 매의 발톱을 가졌으며 머리에는 사슴 같은 뿔과 등에는 81개의 비늘이 있고 토끼같은 눈, 소의 귀, 뱀 큰 조개 같은 모습의 배를 가졌다고 한다.

백룡과 황룡은 임금, 황제를 상징하고 청룡은 사악한 귀신을 내쫓는 벽사를 뜻하며 흑룡, 여룡은 가뭄이들 때 기우제를 올려 비를 구하는 대상이었다.

  용은 전통적으로 고귀하고 신비로운 존재로 비유되어 왕의 얼굴을 용안(龍顔), 왕이 앉는 걸상을 용상(龍 왕의 의복을 용포(龍袍)라고 했는데 왕을 용으로 비유하게 된 사연은 용에게는 인간과 국가를 보호하고 물을 다스리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용을 그리는 방법에도 격식이 있어서 왕실에서 사용하는 용 그림은 발톱이 다섯 개인 오조룡(五爪龍)을 그리고 민가에서는 사조룡(四爪龍)이나 삼조룡(三爪龍)을 그렸다

또 왕과 왕비의 예장에는 오조룡을 수놓은 둥근 보(補)를 착용했고, 왕세자와 세자빈을 사조룡, 세자손을 발톱이 세 개인 삼조룡을 수놓은 보를 착용해서 발톱의 수로 위계를 달리 표현하기도 했다.


봉황 (鳳凰)

  봉황은 고대 중국의 전설로부터 유래된 서조(瑞鳥)로 어질고 현명한 성인과 함께 세상에 나타나는 새라고 전한다.

  수컷을 봉(鳳)이라고 하고 암컷을 황(凰)이라고 하는데 암수를 같이 불러 봉황이라 한다.

봉황의 생김새는 앞모습이 기러기(군신의 의), 뒷모습을 기린(어진성군), 부리는 닭(밝음을 가져옴), 턱은 제비(천심전달), 등은 거북(재앙을 막고 앞날 예견)을 닮았다고 한다.

용과 봉황은 군왕이 갖출 모든 조건을 갖추었다 하여 군왕을 상징해왔는데 두 상징에 서열을 매길 때는 용을 상위에 두어 천자 곧 황제의 상징으로 삼았고 봉황을 황후의 상징이나 천자에게 사대하는 제후나 왕의 상징으로 쓰였다. 그래서 천자를 섬기던 조선시대 왕궁의 정전 천장에 용을 그리지 못하고 봉황을 그렸었는데 조선시대 말기에 고종께서 청나라 사대에서 벗어나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왕에서 황제로 승격되면서 경복궁 근정전의 천장과 임금이 앉는 용상의 뒤에 봉황 그림이 황제의 상징인 용 그림으로 바뀌었다. 이는 창덕궁 인정전에 남아있는 봉황 그림과는 대조적인 좋은 예가 된다.

  봉황그림은 오동나무와 대나무등과 함께 그려지는데 그것은 봉황은 오동나무 아래에만 깃들고 삼천년 만에 한번 열린다는 대나무 열매인 죽실(竹實)을 먹고 산다 전하기 때문이다.


신구도(神龜圖)

  신구라 불리는 거북은 용, 봉황, 기린과 함께 사령수(四?獸)의 하나로 3천년을 산다고 전하여 장수의 상징으로 여겼다.

  등껍질은 하늘의 지붕을 나타내고 그 표면에는 별자리가 나타나 있으며 배의 껍질을 땅을 나타낸다고 한다. 곧 상하의 껍질은 천지 음양의 힘을 나타내 수명과 우주를 상징하는 것이다.

  민화에 보이는 거북은 예언과 수리의 기본이 되는 <하도낙서(河圖洛書)>를 등에 지고 나오기도 하고 복점을 치는 내용의 그림으로 그려지기도 하는데, 이는 중국 하나라 우임금이 낙수에서 홍수를 다스릴 때 등에 아홉 개의 점이 찍혀 있는 거북이 나타났고 이 점은 나중에 주역의 중심 사상인 팔괘가 만들어 졌기 때문이다.

  민화에서 거북은 우리가 볼 수 있는 일반 거북과는 달리 매우 기괴하게 상상적으로 그려지며 대개가 두 마리를 함께 그리고 있는데 우리 선조들은 거북을 장수의 상징으로서 귀엽고 친근한 동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린(麒麟)

  민화에서 기린은 우리가 동물원에서 볼 수 있는 기린이 아니고 털을 가진 땅 짐승의 왕으로서 수컷을「기(麒)」 암컷을「린(麟)」이라고 하는 상상의 동물이다. 기린은 몸이 사슴같이 크고 네다리는 소 발굽이고 목의 털인 갈기는 말과 같고 등 털의 빛깔은 오색이고 배의 털은 황색이라고 한다. 그리고 기린은 머리에 살로 된 뿔이 하나 돋아 있지만 사람을 받아도 다치지 않고 살아있는 풀이나 벌레를 밟지 않으며 왕이 될 사람이 출현할 때 사람들이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기린이 나타나면 세상에 어진 성왕(聖王)이 나와 태평성대를 펼 길조라 생각했다.

해태 그림

  해태는 소의 머리와 말의 얼굴에 외뿔이 하나 있는 상상의 동물로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줄 알며 불을 막아 준다고 한다.

  우리나라 국회의사당에 세워진 해태상은 국사를 논할 때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정의롭게 일하라는 의미라 하겠다. 또한 조선시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불이 자주 일어나자 당대 유명한 석공 이세욱을 시켜 돌로 해태 상을 만들어 세우고 불을 막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해태그림은 불을 막기 위하여 정초에 세화로 그려 부엌문에 붙였던 그림이다.


● 불가사리 그림

  불가사리는 쇠, 구리, 대나무 뿌리를 먹고 살며 악귀를 쫓는다는 전설속의 동물로 생심 새는 곰의 몸에 코끼리의 코, 코뿔소의 눈, 호랑이의 발 쇠톱 같은 이빨, 황소의 꼬리를 가졌으며 온몸에는 바늘 같은 털이나 있고 암컷에만 줄무늬가 나 있어 이것으로 암수가 구별 된다고 한다.                                                                                      -펌 編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