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오리와 함께 육십 평생을 엮어오다
대나무는 사철 제 모습 그대로인데 홀로 백발이 되어간다는 채상장 서한규 보유자. 대나무의 강직함을 이겨온 그의 손에는 60여 년간 단단하게 굳어진 공이가 여럿 박혀 있었다. ‘죽竹일을 하는 사람은 죽粥밖에 먹지 못 한다.’는 말은 담양지역 사람들에게 공공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져 왔다. 서한규 보유자는 열여섯에 죽물竹物과 연을 맺어 대쪽같이 채상 만드는 일에 전념해 왔으니, 그간의 질곡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리라.

100호 중에서 80여 호가 대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던 그의 고향 담양읍 만석리. 죽석(대나무 자리)·삿갓·부채 만드는 일을 생업으로 삼았던 그곳에서 그는 자연스레 죽세공품 제작기술을 익히게 되었다. “대나무 하면 담양이고, 담양하면 대나무지요. 담양은 죽물고장으로 으뜸입니다. 농한기 때 만들어서 죽물시장(5일장)에 내다 팔고. 한강 이남에서 금산(충남) 인삼시장하고, 담양 죽물시장이 지금 동대문시장 못지않았어요. 큰물건·작은물건·별시런 물건이 다 있었습니다.”
오늘날 죽제품 도매시장으로 유일하게 남아있는 담양장은 60년대만 하더라도 장이 열리는 날이면 읍내가 온통 떠들썩했다고 한다. “담양장에서 돈을 못 벌었다면 장사꾼이 아니다”고 할 만큼 성시를 이룬 죽물시장은 아쉽게도 70년대 중반부터 잠업蠶業이 쇠퇴하면서 잠상蠶桑의 원자재인 청죽靑竹의 수요도 크게 줄었고, 오래지 않아 일상생활에 사용되던 대나무가 플라스틱으로 대체되면서 활기를 잃게 된다. 이에 더하여 90년대에 중국과 동남아에서 들여온 값싼 죽제품으로 인해 담양에서 죽일을 하는 몇 남지 않은 이들의 손끝을 더욱 무뎌지게 했다. 중요무형문화재 채상장 1대 보유자 김동연 옹이 1984년에 작고하면서 채상 기술은 1987년 보유자로 인정된 서한규 옹을 통해 명맥을 이어가게 되었다.
평범한 대나무에서 비단 꽃무늬를 피워내기까지

대나무를 종이처럼 얇고, 실 마냥 가늘게 쪼개어 부드럽게 만든 ‘대오리’를 형형색색 염색한 후, 다양한 문양을 놓아가며 엮어 짠 고리(상자) 채상. 대를 재료로 하여 가공한 죽세공품 중에서 가장 정교한 세공을 요하는 것이 채상제작이다. 대오리에 다양한 색채를 염색해서 그 무늬가 아름답기도 하지만, 염색을 하지 않은 ‘소상素箱’의 경우에도 대나무의 겉대와 속대가 서로 다른 색상의 무늬를 만들어 내니 ‘무늬 채彩’자字를 쓴다. 또한 결이 어찌나 매끄럽고 때깔이 고운지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무늬 채’자를 대신하여 ‘비단 채綵’자를 붙여 ‘비단 같은 상자’라는 고운 이름을 지어 주었다.

견고한 채상의 품질은 원재료인 대나무에 달려있다. 채상 제작에는 ‘왕대’만을 사용하는데, 담양의 대나무는 죽질竹質이 강하고, 탄력성과 활렬성(豁裂性, 쪼개지는 성질)이 좋으며, 게다가 경도도 세공하기에 알맞아 정교한 죽제품을 만들기에 적당하다. 잘 고른 대나무를 쪼개고 다시 겉대와 속대로 분리하는 ‘대 뜨는’ 작업을 하는데 한 올 한 올 대를 떠내는 일은 죽세공에 정통하고 많은 경험이 축적되어야 할 수 있다. “대를 가늘고 얇게 떠내는 게 채상에서 제일 기술입니다. 대로 문양을 넣는 것도 기술이지만 대 뜨는 게 젤로 어려워요. 떠내다가 부러지거나 휘어지면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떠 낸 대를 일일이 3mm 정도 너비로 ‘조름썰기’하는 작업과 탄력을 주기 위해 대올을 저민 후 입으로 대올을 물어 겉껍질과 속껍질을 갈라내는 과정도 고도의 숙련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갈라 낸 대를 물에 불린 후, 무릎에 대고 칼로 훑어내 종잇장처럼 만들어 낸다. 잘 다듬어진 대오리에 ‘쪽’이나 ‘치자’ 등으로 염색한 후, 일일이 새올뜨기로 엮으면서 상자의 모양을 잡아간다. 채상은 겉으로 보면 하나의 상자로 보이지만 화려한 무늬로 만들어진 겉상자와 짱짱하게(견고하게) 지탱해주는 속상자의 구조로 어우러져 미적으로도 훌륭하면서 기능성을 겸비하여 결코 뒤틀리거나 처지지 않는다. 올올이 떠낸 2,300쪽의 대오리를 예술적 감각과 능숙한 손놀림으로 꼬박 보름을 움직여야 비로소 삼합채상三合彩箱 하나가 탄생한다. 이처럼 채상은 대나무를 다루는 기술이 절정에 달했을 때 탄생하는 명품이다. 그래서 조선후기 학자들도 채상을 ‘진귀한 물건’이라 극찬하였다.
전통과 현대를 잇는 대물림된 예술혼
임금님이 승하했을 때 봉물封物을 담아 보내는 데에 채상을 사용하였고, 좋은 채상을 진상한 대가로 나라에서 참봉參奉, 봉사奉事의 벼슬까지 내렸다는 이야기는 채상의 고급스러운 가치를 말해준다. 민간에서도 대개 폐백이나 혼수 등 귀한 물건을 담는 용도로 사용해 왔다. 통풍이 잘되니 습기나 곰팡이가 생기지 않고, 오래 담아 두어도 냄새가 배이지 않는 채상. 오늘날 채상은 실용성과 장식성을 더욱 가미한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하여 우리와 만나고 있다.
채상이 다양한 모양과 문양을 입기 시작한 것도 서한규 보유자의 둘째딸 서신정씨가 가업을 돕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전수교육관 안에 진열된 조명등과 다기함 등 실용적이면서도 앙증맞은 작품들이 모두 채상기법을 이용한 것이라고 하니, 전통과 현대적 계승의 절묘한 조화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학교 다닐 때는 관심이 없었어요. 아버지 하시는 일로는 세끼 밥을 겨우 먹을 정도여서 쳐다보지도 않았지요. 그런데 아버지 혼자 일 하시는 게 안타까워서 시작했는데 정말 보람 있어요.” 95년에 그녀가 전수교육조교로 선정되면서 가내수공업으로 이루어지던 채상제작이 활기를 찾게 되었다. 특히 채상의 천연염색법을 복원하여 대오리가 품은 색감을 만끽할 수 있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럽다. 팔순을 넘긴 아버지와 대를 잇는 딸, 이들의 예술혼이 우리에게 채상의 정교함과 고상한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있다.
글·황경순 국립문화재연구소 무형문화재연구실 학예연구사 사진·김병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