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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가객歌客’ 이양교 예능보유자

왕토끼 (秋岩) 2010. 6. 14. 20:19

월간문화재사랑
‘우리 시대의 가객歌客’ 이양교 예능보유자
2010-06-14 오전 09:01




아정雅正하게 노래하는 가사歌詞

가사 보유자 석정石汀 이양교 선생을 찾아간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가객 중에서 가장 오랜 연륜으로, 정가의 역사를 소리에 오롯이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노래가 반주를 치고 나가는 게 가사예요. 가곡처럼 악기에 따라독자적인 가락이 있는 게 아니라서 노래선율에 반주가 따라가는 거지. 가사는 장구에다가 선율악기로 대금이나 피리만 있어도 노래할 수 있어요. 아정하게 불러야 제대로지.”

뒷목의 압박을 풀어 보다 자연스럽게 발성해야 백자처럼 꾸미지 않은 고졸하고 담백한 가사의 맛을 살릴 수 있다는 그의 설명이다. 조선후기에 우리말로 지은 대표적인 국문학 장르인 가사歌辭에다가 노랫말長歌을 얹어 부르는 것이 바로 가사歌詞이다. 사실 판소리나 민요 등에 비해 가사는 우리에게 그리 익숙하지 않다. 아니 정가正歌라 불리는 가사, 가곡歌曲, 시조時調가 모두 우리에겐 아직 낯설다.




시조를 귀동냥하며 성장한 서산의 소년명창

석정石汀 선생은 충남 서산군 부석면 강당리에서 태어났다. 한학자이셨던 부친이 서당을 운영하셨는데, 이곳에는 항상 시조를 부르는 가객歌客들로 들끓었다. 워낙 음악을 좋아하던 선생은 자연스레 시조를 따라 읊게 되었고, 귀동냥으로 여러 소리를 익히며 성장하였다. 18세에 이르러 서산지방에서 시조 명인으로 이름을 떨치던 이문교李文敎와 그의 제자 류병익柳炳益에게 본격적으로 시조를 배우게 된다. 10여년 남짓 30리 길을 마다않고 매일 스승의 집을 드나들면서 시조를 착실하게 배운 소년 이양교는 어느새 ‘서산군의 소년명창’으로 입소문이 나 있었다.


 

소리에 빠져 직장에서 쫓겨나기를 여러 차례

“면서기로 일하고 있는데 마침 라디오에서 명창들이 소리를 하는데 문득 서울에서 소리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직업이고 뭐고 당시에는 면서기 자리가 인기가 많았는데 미련 없이 서울로 올라왔단 말이지.”

선생은 서산 군청 면서기로 재직하다가 돌연 안정적인 직장을 포기하고 서울로 상경한다. 지금 돌이켜 보아도 소리에 미쳤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며,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은 그 시절 청년으로 되돌아 간 것만 같다. 가족들의 만류도 소용없었다. 그는 이미 소리공부 외에는 관심이 없던터였다. 상경하여  전국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시조명인들을 만났다. 옆에서 소리를 들으며 자연스레 여러 경제京制 시조들을 익혔던 그 시절. 선생은 하숙비도 떨어져 낙향을 해야 할 처지에 이르렀지만 마냥 행복한 시기였다고 회상한다. 운 좋게 종로구청에 취직하게 되었으나 시간만 나면 시조방에 가서 소리하는 그를 곱게 봐주는 직장은 없었다. 얼마 못가 직장 대신 매일 남산으로 출근하여 시조를 불렀던 그다. 밥은 굶어도 소리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그에게 재능을 펼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찾아 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스승, 그리고 국악원과의 인연

1959년 운니동 교육15사 창설기념 전국시조경창대회는 그에게 일반인 부분 대상이라는 영광과 훗날 가사와 가곡의 예능보유자로 인정되는 이주환 선생과의 만남이라는 두 가지 선물을 안겨주었다.

“이주환 선생님은 정말 선비 같은 분이셨어요. 직접 저를 찾아와 ‘고금시조집’을 챙겨주시면서 국악원에 들어오지 않겠냐고 제안하셨어요. 가사하고 가곡, 거문고를 배워보라고 권하셨죠.”

대회를 지켜 본 이주환 선생은 석정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 국악인의 길을 권유하였고, 이로서 1969년 석정의 국인인으로서 인생이 시작되었다. 선생은 이주환 선생으로부터 12가사 중 9가사를 전수 받았고, 선생 타계 후 나머지 3가사를 완성하기 위하여 한성 권번출신 최정희 선생과 장사훈 선생에게 3가지 가사를 배웠다. 오늘날 전해지는 12가사는 석정의 가사 전승에 대한 열정의 결과이며, 1975년 그는 중요무형문화재 제41호 가사 예능보유자로 인정 받게 되었다.




사납고 매운 가르침

석정은 제자들에게 사납고 매운 공부를 시키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선생님께서는 얼마나 엄격하고 정확하게 일러주셨던지, 배우기를 쉬지 않고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말을 몸소 배우고 느꼈던 시간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추우나 더우나 교습을 한 번도 거르는 일이 없었어요.”

전수교육조교의 말에서 가사에 대한 석정의 철학이 묻어난다. 보유자로 인정 받은 이후 그는  12가사 음반과 저서를 펴내고 황규남, 이준아 전수교육조교 등 여러 제자들과 함께 1994년에 ‘서울가악회’를 창립하여 가사를 비롯한 정가 보급에 힘쓰고 있다.

“정가(가곡, 가사, 시조) 중에 특히 가사 12곡이야말로 매우 어렵고 둔재鈍才들은 부를 수 없는 음악이란 말이지. 음악에 소질이 있는 이도 갈고 닦아서 꾸준히 노력하고 연구해서 오래 많이 해야 스스로 얻어지는 것인데, 그저 부른다 해서 가사 부르는 사람으로 인정 할 수는 없어요. 고목에 움이나 꽃 핀다는 말이 있어요. 성악에도 움목이 나야한다는 말이 있지요. 즉 많이 불러서 다시 태어나 움목을 얻으라는 말입니다.”

타고난 재능에만 기대여서 좋은 소리가 나올 수 없는 가창이 어디 가사 뿐이겠는가. 이양교 보유자는 구자득지久自得之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강조하였다. “정가를 아는 사람이 드물어요. 안타깝지요.” 그의 말에서 아쉬움이 새어 나온다. 젊은 시절 소리에 목이 말랐다면 현재는 젊은 전승자들의 참여에 목이 말라 있는 그다.            

12가사(歌詞) : 춘면곡(春眠曲)·백구사(白鷗詞)·황계사(黃鷄詞)·죽지사(竹枝詞)·양양가(襄陽歌)·어부사(漁父詞)·길군악(一軍樂)·상사별곡(相思別曲)·권주가(勸酒歌)·수양산가(首陽山歌)·처사가(處士歌)·매화타령(梅花打令)


글·황경순 국립문화재연구소 무형문화재연구실 학예연구사  
사진·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