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괘릉과 서역무인상
괘릉의 능원에 들어서면 저 멀리 보이는 왕릉의 봉분을 정점에 두고 좌우로 석물들이 능원 입구까지 서로 마주보며 도열해 있다. 봉분은 병풍석을 두르고 있고 여기에는 십이지상의 동물들이 순서에 따라 12방위에 배열되어 있으며 그 주위는 난간석을 두르고 있어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전성기의 왕릉 봉분의 설치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봉분을 중심으로 그 아래쪽에는 능역의 맨 위쪽으로부터 석사자 2쌍, 그 다음에는 무인석 2쌍, 맨 마지막에는 화표석 1쌍이 서 있다. 그 중에서도 이곳 괘릉에 서 있는 무인석 1쌍은 서역인의 용모에 옷을 입은 모습이나 무기를 든 모습 또한 워낙 독특하여 예전부터 괘릉을 언급할 때마다 으레 등장하는 화제였다.
또 예전에는 이 두 쌍의 석인상 중에서 한 쌍은 문인석이고 나머지 한 쌍은 서역인 형태의 무인석으로 알고 있었는데 몇 년 전부터는 문인석 모양의 석상마저도 역시 무인석이라는 사실이 학술적 연구에 의하여 검증되었다. 얼핏 보면 머리에 관을 쓰고 관복을 입고 소맷자락 속에 두 손을 모은 채 근엄한 자태로 서 있어 문인 석상처럼 보이나 자세히 보면 관복 속으로 쥔 긴 칼이 발끝까지 보이고 관복의 뒷면은 갑옷무늬를 장식하고 있으며 머리에 쓴 관의 한 가운데에는 벌이 장식되어 있어 이러한 것들은 중국의 무관들도 착용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괘릉과 신라 왕릉 조영사
그러나 이러한 독특한 구조의 괘릉이 지닌 문화재적 가치나 서역인 석상이 등장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무궁한 상상과 그와 같은 역사적 배경을 추적하고픈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점 등은 이미 오래전부터 관심을 가져왔고 지금은 누구나 대략 그러한 역사적 환경을 이해하고 있는 터라 그다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와서 구태여 괘릉의 석상과 구조에 대하여 또다시 언급하려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우선 좀 더 커다란 역사적 흐름 속에서 괘릉을 해석해보자는 것이다. 사실 괘릉의 독특한 구조는 괘릉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신라 왕릉의 구조는 이미 통일신라 성덕왕릉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비록 서역인 무인석상은 보이지 않지만 석사자가 봉분 주위의 사방에 배치되어 있고 관복을 입은 무인석상이 봉분 앞 좌우에 배치되어 있는 점에서 그 선행구조를 살필 수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봉분 둘레에 호석의 구조물을 설치한다거나 두른다거나 호석에 십이지상이 배치되는 구조는 이미 그보다도 더 오랜 왕릉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신라 왕릉의 구조는 어느 시점에서 새로운 변화를 일으켜 점점 발전적으로 진행되어왔다는 점이 포착된다.
넓은 시각으로 보아 신라의 왕릉 구조는 통일신라시대에 들어 과거와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그 첫 번째 특징은 신문왕릉에서 나타나고 있다. 봉분 주위의 호석이 과거와는 다르게 높직하고 탄탄하게 구축되고 또한 이 호석들이 무너지지 않도록 삼각 받침석을 줄줄이 두르고 십이지상도 단독 석상들로 배치되었다. 또한 봉분 앞에는 장방형 석재로 탄탄한 제단을 만들어 전체적으로도 과거의 왕릉보다는 훨씬 격조를 높인 왕릉의 구조로 설계되었다. 그 후 성덕왕릉에서도 이러한 구조는 그대로 전승되고 여기에 십이지상과 봉분의 난간석과 석사자 그리고 무인석상이 더해졌다. 봉분 앞의 제단인 상석 또한 훨씬 정제되었다. 경덕왕릉에서는 이 모든 구조가 다 유전되지는 않지만 기본적인 통일신라 왕릉의 틀이 계승되었고 원성왕릉인 괘릉에 이르러서는 봉분의 호석과 제단, 석사자 등은 물론 무인석상에 서역인 용모의 무사상까지 등장하였다. 또한 이러한 구조는 이보다 후대에 세워진 흥덕왕릉에서도 나타나고 있어 통일신라시대 왕릉의 커다란 구조특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괘릉 구조물이 지닌 의미
이러한 통일신라 왕릉의 구조특징은 중국의 당 나라나 그 어떤 다른 나라의 능제를 전적으로 모방하지 않은 매우 독창적 발상에 의하여 완성된 점이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주 시내에 널리 분포하고 있는 통일기 이전의 왕릉은 평지릉이 많고 비록 봉분의 규모는 훨씬 거대한 것도 있을지라도 외형의 격식을 생략한 고식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심지어는 왕릉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독립분이 아니라 봉분이 겹치는 밀집구조의 고분도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통일기 이후의 대표적인 왕릉들은 이처럼 그 능원설계의 구조부터가 과거와는 확연히 다른 수준 높은 격식과 새로운 차원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문화 발전의 흐름은 감은사를 지으며 새로운 통일기의 석탑양식으로 감은사 석탑을 창안한 것을 필두로 사천왕사, 석굴암,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성덕대왕 신종 등 건축과 조각 그리고 공예와 석조미술 등에서도 통일신라 특유의 창조적 발상이 전개되는 점과 다르지 않다.

괘릉의 설계에서 서역인의 무사상이 세워졌다고 해서 실제로 그 당시 서역무사가 신라의 왕을 호위하였는지 여부는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분황사 석탑, 감은사 사리기 등에서 보듯 부처님을 위한 성보를 조성할 때 서역인 모습의 사천왕, 인왕상 그리고 신라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사자 등이 탑이나 사리기를 호위하는 법식이 이미 당시의 신라사회에서 통용되고 있었다. 따라서 그 이후 왕릉의 격식을 드높이기 위하여 불탑이나 사리기에서 배치되었던 석사자, 서역무사상 등이 왕릉을 호위하는 석물로 얼마든지 응용될 수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통일신라시대에 국제교류가 왕성했다 하더라도 과연 말도 통하지 않고 살아온, 문화도 판이한 서역출신 호위무사를 신라왕들이 대대로 고용하였는지는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일이다.
괘릉에 대한 새로운 인식
괘릉을 바라보며 왕릉 전체가 지니는 역사적 가치는 잠깐 뒤로 한 채 우선적으로 이곳에 서 있는 서역무사상의 실재적인 존재 여부에만 집착하는 것은 그리 권장할 만한 것은 아니다. 이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괘릉이란 왕릉의 설계가 이후 우리나라 역대 왕릉 구조의 모체가 되었다는 점을 주목하는 일이다.
고려 왕릉 중에서 가장 수준 높은 격조를 보이고 있는 공민왕릉이나 세계 문화유산으로 인정된 조선왕릉을 보라. 비록 시대의 흐름에 따라 구조물의 양상은 달라졌다 하더라도 봉분에 병풍석과 십이지상을 두르고 호석과 둘레난간을 배치하며 봉분 앞에 석단을 놓고 문무인석을 배치하는 커다란 틀은 이미 통일신라시대의 왕릉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지나쳐서는 안된다. 통일신라시대에 완성된 석가탑의 양식이 오늘날까지 한국 석탑양식의 근간을 이루어 왔고 성덕대왕신종 역시 오늘날까지 한국종의 모체가 되었듯이 괘릉 또한 통일신라 왕릉을 대표하는 능원으로써 창안되고 그 이후 면면히 한국 역대 전통왕릉의 모본이 되어 왔다는 점에 더욱 크나 큰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
글·사진 | 소재구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 사진제공·엔싸이버 포토박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