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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노비 주인과 갈등만 있었을까?

왕토끼 (秋岩) 2010. 3. 24. 14:17

월간문화재사랑
조선시대 노비 주인과 갈등만 있었을까?
2010-03-11 오전 10:33




노비를 말하다

<추노>의 시대적 배경은 노비 숫자가 인구의 절반을 넘었던 1600년대 중반이다. 역사적 관점으로 봤을 때 이 시기는 노비의 사환과 납공納貢이라는 노비의 성격이 급속하게 변질되던 시기였다. 즉 재산으로 취급되면서 사환이라는 인신지배 중심에서 몸값身貢의 납부라는 경제 관계로 이행되던 시기였다. 이 같은 변화는 임진, 병자 양란이 초래한 결과였다. 이에 양반의 노비 지배는 느슨해질 수밖에 없었다. 소유의 실질적 가치가 하락하면서 양반들은 노비를 대량 매각하였다.

그 직접적 원인은 주인과 떨어져 사는노비, 즉 외거노비들이 거주를 빈번히 옮기면서 더 심화되었다. 이들이 옮겨 간 곳은 산간 혹은 도서 벽지가 많았다. 이러한 지역은 주인의 직·간접적 통제를 벗어날 수 있는 여건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간척지 등 생계 여건이 비교적 잘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주移住는 노비들의 입장에서 보면 생존을 위한 거주지 이동이었다. 하지만 소유주 양반의 입장에서 보면 ‘도망’이었고, 양반 호적에도 도망이라 기입하였다. 도망이란 소유자 입장에서 쓴 용어이며, 추노推奴 또한 상전의 언어였다.

드라마의 제목, 추노推奴는 도망간 노비를 찾거나 잡아오는 단순한 행위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추노의 ‘추推’자는 추심推尋, 추쇄推刷를 줄여서 쓴 말이다. 국가 혹은 양반이 추진하는 노비 추쇄는 노비의 출생과 사망, 노장약老壯弱과 같은 노동력의 다과, 신분 및 소유권 귀속 등을 종합적으로 조사하는 행위, 바꾸어 말하면 노비 현황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일이었다. 효종 대에 대대적으로 실시한 추쇄도감推刷都監은 이러한 목적으로 설치된 것이었다.




평민의 마지막 생계 대책, ‘구활口活’ 노비

남이 종이 된 사람의 장점도 있었다. 그들의 생계를 소유주인 양반이 책임진다는 점이 일반 평민이 가지지 못한 장점이었다. 조선후기에 평민이 노비가 되는 경우가 흔한데 그 이유는 생계 때문이었다. 생계를 잇기 위해 본인 또는 가족의 몸을 파는 문서를 이른 바 ‘자매명문自賣明文’이라 하였다.

평민들 가운데는, ‘춘궁기를 만나 살아갈 방도가 없어當此窮春 生理爲難’, ‘칠십 노부모가 춘궁기를 만나 목숨을 보전할 길이 없어七十老父母 當此窮春 無保命之道’ 혹은 ‘수많은 채무를 갚을 길이 없어서許多出債 報償無路’ 스스로 몸을 팔았다. 이 때 양반들은 재산을 불렸다고 마냥 쾌재를 불렀던 것은 아니었다. 도망이 횡행하여 고가의 동산動産인 노비를 한순간에 날리는 경우도 빈번했고, 감정을 품은 종들이 살주계殺主契, 검계劍契를 결성하여 상전의 목숨을 노리는 경우도 허다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자매문기에는 매매자 사이의 이해가 맞아 거래하기도 했지만 노비 자신이 애걸복걸하여 겨우 매매가 성사되는 경우가 또한 많았다. 어찌 보면 양반이 최후의 사회보장의 일익을 담당했다고도 볼 수 있다.

조선전기의 경우 압량위천壓良爲賤이라 하며, 이를 금지하였으나 흉년이 심했던 조선후기에는 자매自賣 행위를 허용하기도 하였다. 양반들은 평민이 자매하여 노비가 된 사람들을 ‘구활口活’ 노비로 불렀다. 매입함으로써 목숨을 살려주었다는 뜻이었으나 몸을 판 당사자 입장에서는 비록 몸은 남의 종이 되었지만 목숨은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상생을 위한 노사화합, 노주계奴主契

노비를 합법적으로 소유하면서 그 이익을 배가하기 위해서는 노비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방법 밖에 없었다. 그 방법 중 최고의 대책은 소유 노비와 계契를 맺는 것이었다. 계 없이는 설명할 수 없는 사람들이 우리 민족이다. 서원이나 향교의 동기 모임인 학계學契, 같은 나이의 모임인 동갑계同甲契, 같은 동리에 거주하는 사람끼리의 동계洞契, 문중 모임인 종계宗契, 장례를 치를 때의 상계喪契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이러한 계 가운데 요즘의 노사 화합을 목적으로 한 계가 노주계이다.

노주계는 상전이나 노비들이나 각각의 이익을 도모하자는 데서 결성되었다. 다음은 경주 어느 양반가에 남아있는 노주계 문서이다. 일선日先 차봉次奉 화리동禾里同 등 노비 10명이 이씨가 종손 이희성과 계를 맺은 것은 1801년(순조 1)이었다. 관아의 노비, 곧 공노비가 해방되는 바로 그 시점이었다. 이들은 계금으로 4석의 벼를 마련하였는데, 주인과 노비들이 각각 2석씩 그 절반을 부담하였다. 이들은 이 돈을 재원으로 이식利殖을 계속하여 계금을 불렸나갔다.

이렇게 계를 만들고 계금을 불린 이유는 양쪽 모두 이익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주인에게는 무조건적인 노비 도망을 예방하고 사환을 용이토록 하는 바람이 있었고, 노비들은 그들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기금을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노비의 안정적 생활여건은 노주奴主 양쪽 모두에게 이익이 되었던 것이다. 상전과 노비 양쪽이 출연하여 마련한 기금은 주인집의 담장 수리와 같은 빈번한 잡역에 대한 임금으로 쓰였다. 원래 이러한 일은 노비들이 당연히 해야 할 의무였다. 계를 설립한 이후에는 자신들이 마련한 기금으로 사람을 고용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 일을 시켰던 것이다. 주인과 노비 관계가 단순히 신분 관계에서 일정한 임금을 지불하면 되는 경제적 관계로 이행되는 순간이었다.

18세기 후반 19세기 초 유행했던 노주계의 신분제 혼돈 속에 나타난 매우 의미심장한 사회 현상이었다. 노비에게 있어서는 굴레였던 신분관계를 임금이라는 경제관계로 진전시키는 한 단면이었다. 우리의 역사는 이렇게 하여 한걸음 씩 앞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글·안승준 한국학중앙연구원 고전자료정보화연구실장    
사진제공·문화재청,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송광사, 너머북스출판(나는 노비로소이다, 저 임상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