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300년을 지켜온 만석꾼의 비밀(경주최씨가문) 옮겨온글

왕토끼 (秋岩) 2010. 1. 13. 20:00

*300년을 지킨 만석꾼의 비밀

[ 경주 최씨 司成公派 崔浚(최준) 집안

[경주최씨]의 경주 [최부잣집]

‘權不十年, 富不三代’란 말이 잇는데, 이 집안은 9대에 걸쳐 진사를 했으며,

12대에 걸쳐 만석꾼을 했다.

이 기록적인 의미도 크지만 그 富의 관리와 베풂이 훌륭하기 때문이다.

1) 이 집안의 내력을 알아보자.

    최부잣집은 경주최씨 사성공파의 지파인 가암파(佳岩派)이며,

    파조(派祖)는 최진립(崔震立ㆍ1568-1656)이다.

   최진립은 경주최씨 시조 최치원의 17세손으로

   부친 최신보(1531-1577)가 정착했던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가암촌(佳岩村)

   에서 태어나 살았다.

2) 최신보는 이웃 마을에 살던 참봉 황임종의 외동딸과 결혼했는데,

    황 참봉은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부잣집 처가 재산을 모두 상속받게 되어 일시에 부자가 됐다.

    그 후 부인 황씨가 갑자기 죽게 되고, 그는 재혼하여 강씨를 계실(繼室)로

    들였는데, 장인 강씨도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다.

    두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게 된 최씨 집안은 더 큰 부자가 됐다.

    딸에게도 상속권이 있었던 때라 처가 재산을 상속 받은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3)최신보의 아들 최진립은 총명했고 천품이 준수했다.

   재산과 덕행을 겸비해 추앙받는 토호가 됐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으로 공을 세웠고,

   병자호란 때는 68세의 노쇠한 몸으로 경주에서 군량미와 의병을

  이끌고 남한산성 전투에 출전했다가 전사했다.

  그의 셋째 아들 최동량이 마을에 인접한 형산강 상류를 간척하게 됐다.

  그는 간척지를 경작하는데 소출한 곡식을 반반씩 나누는

   병작제를 적용하였다.

   병작제의 소식을 듣고 소작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

   최씨네 땅 간척에 적극 협력했다.

   이렇게 전답을 크게 확장했고, 그의 아들 최국선은 만석지기

   대지주가 됐다.

4)그 후손들이 대를 이어 7대가 만석꾼을 유지해오다가 집안의

  불화와 갈등으로 최진립의 8세손 최기영(1768-1825)이

   현 교동으로 이주했다.

   그 이전에 최언경(1743-1804)이 지금의 터에서 미리 살고

   있었다는 구전도 있다.

   지금의 교동에서는 기영, 세린, 만희, 현석이 차례로 토반으로서

   만석지기의 집안을 탄탄하게 지켜오다가 최준 대에 이르러

   가세가 쇠퇴했다.

5)문파(汶坡) 최준(崔浚ㆍ1884-1970)은 시조 최치원의 28세손이고

   파조 최진립의 12세손이다.

   영남의 대지주인 그는 일제강점기에 대한광복회 재무를 맡았고,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자금을 제공하고

   항일투쟁을 했다.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백산상회도 부도가 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3만 석에 해당하는 빚을 지게 됐고, 이로 인해

   일제 식산은행과 경상합동은행에 의해 대부분의 재산이 압류되었다.

   이후 남은 재산을 계림대학과 대구대학(영남대학교 전신)의

   설립에 내놓았다.

   이렇듯, 그는 '최부잣집'의 품위를 끝내 잃지 않고

   마지막 만석꾼 자리에서 물러났다.

6) 이 집안은 '부불3대(富不三代)'란 말을 비웃듯이

    12대 동안 만석꾼을 지켜왔고,

    또 세상의 인심을 재산만큼 쌓고 살았었다.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그 답은 집안의 가훈에서 찾을 수 있다.

    집안사람들이 가훈을 충직하게 궁행(窮行)했기에

    '최부잣집'의 전설이 후세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 가훈이 참으로 훌륭하다.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을 하지 말라고 하였다.

       여기서 과거는 대과가 아닌 소과 중 진사과를 말하며,

       진사(進士)는 진사과 급제자에게 주어진 미관말직으로

       일종의 명예직이었다.

       이 집안은 9대가 진사까지만 했다.

둘째,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말라 했다.

       실제 만석 이상의 소출이 나면 소작료를 감면해 주었다.

셋째, 어떤 과객도 후하게 대접하라 하였다.

        과객이 많을 때는 하루에 100명이 됐던 때도 있었다고 한다.

넷째, 흉년에는 재산을 늘리지 말라 했다.

        헐값으로 전답을 사들이지 말라는 뜻이다.

다섯째, 시집온 며느리는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으라 했으며, 

여섯째, 사방 100리 안에 굶어죽은 사람이 없게 하라는 것이었다.

7) 최부잣집은 매년 쌀 생산량 중 1000석은 과객에게 베풀고,

   1000석은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쌀창고를 보면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이다.

   쌀 800석을 보관할 수 있었으며, 이런 쌀창고가 4채가 있었고,

   하인이 100여 명이 됐다고 한다.

8) 경주최씨 사성공파의 '최부잣집'은 300년이 넘게 지켜온

   만석지기를 잃었지만,

   그 동안 노블레스 오블리주(상류층 도덕적 책무)를 충직하게

   실천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전남일보 제공 자료] ...........,  해설사  이 원 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