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동구청은 제77회 동구아카데미 강좌를 개최하였다. 강사로는 다산연구소 이사장 박석무 現 성균관대학교 석좌교수를 초청하여 많은 지역주민을 모시고 다산선생 생애에서 배우는 오늘을 사는 지혜 라는 주제로 1시간40분에걸쳐서 자주듣기 어려운 실속있는 내용의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먼저 모두발언을 통해서 광주광역시 동구에 사시는 것만으로도 자부와 긍지를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라는 부탁과 함계 충장로와 금남로 도로명에 대해서 설명을 하였다. 충장로는 충장공 김덕령장군의 호를따서 충장로로 명명하였으며 당시 김덕령장군의 기계는 하늘을 찌를듯한 무와 기 예를 겸비한 훌륭하신 선비로서 광주를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금남로는 인조2년 이괄의 난에서 혁혁한 공을 인정받아 임금으로부터 금남군이라는 군호를 추서받고 광주역사에 지대한 공헌을 하신 정충신장군의 업적을 기리기위해서 금님로로 명명하였다고한다. 이어서 본강의로 다산선생의 일생에대해서 애기하였다.다산 정약용선생은 1762-1836년졸 75세를 사셨으며 경기도 남양주에서 출생하여 15세때 16세인한살연상의 아내 회현동 풍산홍씨와 결혼 서울처가에서 3년을 묵으면서 공부하여 22세에 진사에 합격하고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등용되었다. 당시 조선후기 정조대왕의 총애를한몸에받고 수원 화성을 축조하라는 명을받아 설계에서 부터 축조에 깊이관여하였다. 최초 축조계획은 10년을 잡았으나 정약용의 아이디어로 기중기, 거중기를 발명하여 성을쌓는데 2년9개월만에 공기단축 공사를완료 하여 당시의 화페로 4만량의 경비를 절감하였다고한다.정조임금은 물론 온백성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이로서 다산에게는 승승장구의 길을 걸을 수 있었으나 정약용의 나이39세에 정조임금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정난에 휩쓸려 그의나이 40에 유배살이를 가게된곳이 강진이였다. 이곳에서 비참한 생활이 시작되였고 주반을 파는 주모를 만나 8년을 주막에서 보내다 다산의어머니 해남윤씨가문의 도움으로 다산초당에서 10년을 지내면서 후학들을 가르쳐 6명의 학자를 배출하였다고한다. 절망속에서도 좌절하지않고 희망을 가지고 책을 벗삼아 500권의 저서를 집필하게된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공직자의표본으로 목민심서를 꼽을 수 있다. 다산의 이론은 실용주의자로 도덕적인 삶, 깨끗한 삶을 늘 강조하셨다고 전해진다. 찰영.편집.(글) 최 종 환
개식에 앞서 사회자의 강의내용을 설명하고있다.~~~~~상
무대 단상 ~~~~상
박석무 강사님의 입장하는장면~~~~상
잠시 대기의자에 앉아계시는 박석무 강사님~~~~상
맨 앞줄 동구청 관계자들 우로부터 부구청장님, 아카데미 협의회장님,~~~~~상
강의를 듣기위해 참석하신 지역주민들~~~~~상
구청장님을 대신하여 협의회장님이 강사님을 소개하고 있다.~~~~상
이어서 부 구청장님이 참석자들위해서 인사하고 있다.~~~~상
꽃다발 증정 협의회장님이 강사님에게 꽃다발을 선물하고있다.~~~~상
강의를 마치고 질문하는 순서 어느분의 질문을 받고 있다.~~~~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