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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공지설(牛公之說) ----- [이균성]

왕토끼 (秋岩) 2009. 1. 2. 21:02


우공지설(牛公之說) ----- [이균성]




    솔직히 말하면 나 무지 섭섭하다.
    한편으로 생각하니 내 삶도 참 기구하다.
    신석기시대부터 너희는 날 길들였어.
    그때부터 난 너희한테 모든 것을 양보했지.




    너희 마음대로 너희 땅이라 정한 곳에서
    풀 뜯고 산다는 죄로 평생 쟁기 끌고 수레도 끌었다.
    그러고도 모자라 나 힘 빠지면 살과 뼈와 가죽까지 바쳤지.




    아내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어.
    새끼 낳아 너희 재산 불려주었건만
    너희는 내 새끼 먹을 젖까지 훑어갔다




    너희 가운데 심한 자는 나와 내 형제간에 싸움을 붙여놓고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낄낄 거렸지.
    더 심한 경우도 있어. 날 흥분시켜 길길이 날뛰게 하고
    내 정수리에 칼을 꽂아 넣는 일로 영웅이 되더구만.




    너희는 참 좋겠다. 날 먹는 방법도 가지가지여서.
    생으로 먹고(회) 말려 먹고(포) 끓여 먹고(국)
    삶아 먹고(수육) 조려 먹고(장조림), 구워 먹고….



    어디 살만 먹던가. 피와 곱창 그리고 뼈까지….
    참 알뜰하기도 하지.
    엉덩이뼈나 꼬리 등을 넣고 오랫동안 푹 삶아 우려낸
    설렁탕과 곰탕 그리고 국밥도 많이들 먹지.



    너희는 그렇게 맛있게 날 먹지만 난 원래 풀만 먹는다.
    초식이지. 풀은 거칠어.
    내가 되새김질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야.
    거친 풀은 한 번에 소화시키기 힘드니까 반추하는 거지.




    너희는 그런 나에게 식성까지 바꾸라 했다.
    동물 뼈 등 온갖 것을 섞어 먹이려 했어.
    아마 얼른 키워 빨리 잡아먹으려는 욕심이었겠지




    그 것 때문에 내 몸엔 씻지 못할 병이 생겼다.
    먹을 수 없는 걸 억지로 먹이는 것도 고문이란다.
    그 스트레스 무시할 수 없지. 의술이 뛰어나다는 너희도
    아직 내 병의 원인을 정확히 밝혀내지는 못한 모양이더라.




    그러나 난 알아. 내 몸이니까.
    스트레스는 우리들에게도 만병의 원인일 수 있어.




    병이 들자 너희는 나더러 미쳤다고 했다. 미친 소라
    불렀지. 나, 진짜 미칠 것 같다. 병 주고 욕하니 누군들
    미치지 않고 견딜까. 참 가관이었다.




    내 몸에 생긴 병을 놓고 너희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는
    모습이라니. 그 꼬락서니가 얼마나 우습던지.
    어쩌다가 나와 너희 관계가 이 지경까지 왔는지,
    서글플 뿐이다.




    돌이켜보면 내가 너희에게 늘 푸대접만 받고 살았던 건
    아니야. 드물기는 하지만
    너희 가운데 나를 신으로 숭배하는 민족도 있다.




    짐 나르고 밭가는 노고를 인정해 한반도 조선왕조 때는
    나를 죽이지 못하도록 하는 법을 만든 적도 있지.
    나를 제 가족으로 여겼던 농군도 많았다.
    지금 생각해도 고마운 일이야




    2009년 한 해는‘힘 좋고 순하며 듬직한’소에게서 배우자
    고 한 목소리로 외칠 거야. 욕심이 지나쳐 불거진 경제
    혼란을 극복할 방법으로 소의 심성을 배우자고들 할 걸.




    황희를 깨우친 농부 이야기 다들 알고 있겠지.
    나와 내 친구의 우열을 묻는 황희에게 농부는 귓속말로
    속삭였어. 나와 내 친구가 들을까봐.
    그 답을 들었다면 둘 중 하나는 섭섭해 했을 거야.




    나와 내 친구에 대한 농부의 섬세한 배려를 내 어찌 잊을
    수 있겠니. 그 일로 불언장단(不言長短)이란 말이 생겼다.




    새삼스레 지난 일을 돌아본 까닭은 너희가 정한 기축년
    (己丑年) 소띠 해가 다가왔기 때문이야.
    너희는 또 나에 대해 온갖 의미를 말하겠지.




    2009년 한 해는‘힘 좋고 순하며 듬직한’소에게서 배우
    자고 한 목소리로 외칠 거야. 욕심이 지나쳐 불거진 경제
    혼란을 극복할 방법으로 소의 심성을 배우자고들 할 걸.




    그래. 너희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굳이 내가 말릴 까닭은
    없어. 한 번 해 봐. 진인사대천명이란 말도 있잖아.
    모든 게 잘 될 거야.



2008년 12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