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대 단종 가계도(1441-1457)
제6대 단종 가계도
문종 - 현덕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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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정치사
1. 어린 단종의 즉위와 왕위를 찬탈하는 왕숙
2. 계유정란 과 단종 복위 운동
3. [단종실록] 편찬
역사 개요
▣ 단종 (端宗) |
이름 홍위(弘暐). 문종(文宗)의 아들. 어머니는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 비(妃)는 돈령부판사(敦寧府判事) 송현수(宋玹壽)의 딸인 정순왕후(定順王后). 1448년(세종 30) 왕세손(王世孫)에 책봉되고,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세자(世子)에 책봉되었다. 1452년 문종의 뒤를 이어 왕위(王位)에 올랐는데, 그 전에 문종은 자신이 병약하고 세자가 나이 어린 것을 염려하여 영의정 황보 인(皇甫仁), 좌의정 남지(南智), 우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에게 세자가 즉위하여 왕이 되었을 때의 보필을 부탁하였다. 한편 집현전(集賢殿)의 학사인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등에게도 좌우협찬(左右協贊)을 부탁하는 유언을 내렸다.
즉위 해 고려의 개국공신 배현경(裵玄慶), 홍유(洪儒), 복지겸(卜智謙), 신숭겸(申崇謙)과, 유금필(庾黔弼), 서희(徐熙), 강감찬(姜邯贊), 윤관, 김부식(金富軾), 조충(趙沖), 김취려(金就礪), 김방경(金方慶), 안우(安祐), 김득배(金得培), 이방실(李芳實), 정몽주(鄭夢周) 등을 왕씨(王氏) 묘정(廟庭)에 종사(從祀)하도록 하였다. 1453년(단종 1)4월 경회루에 나가서 유생들을 친히 시험 보이고, 또 모화관에 가서 무과를 베풀었는데 권언(權#언18) 등 40명이 뽑혔다. 온성과 함흥의 두 고을에 성을 쌓고, 나난(羅暖)·무산(茂山)의 두 성보(城堡)를 설치하였다. 악학 제조 박연(朴堧)이 세종의 《어제악보 御製樂譜》를 인쇄, 반포하기를 청하니, 왕이 이를 허가하였다. 왕이 대신 황보 인, 김종서, 정분(鄭#분37) 등을 불러 그들에게 자문하여 박중림(朴仲林)을 대사헌에 임명하였다. 그런데 1453년 그를 보필하던 황보 인 ·김종서 등이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에 의해 제거당하자 수양대군이 군국(軍國)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였으며, 단종은 단지 이름뿐인 왕이 되었다. 즉, 10월 작은아버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정권을 빼앗고자 자기 측근인 권람(權擥), 한명회(韓明澮)의 계책에 따라 무사를 거느리고 가서 좌의정 김종서는 그의 집에서 죽이고, 영의정 황보 인, 병조판서 조극관(趙克寬), 이조판서 민신(閔伸), 우찬성 이양(李穰) 등은 대궐에 불러와서 죽였다. 한편, 양성지(梁誠之)로 하여금 《조선도도 朝鮮都圖》,《팔도각도 八道各圖》를 편찬하게 하였다. 1454년 정월 송현수(宋玹壽)의 딸을 맞이하여 왕비로 삼았다. 이 달에 집현전 양성지가 《황극치평도 皇極治平圖》를 찬진하고, 3월 춘추관에서《세종실록》을 찬진하였다. 5월 좌승지 박팽년이 경연에서 왕에게 안일과 태만을 경계하도록 진언하였는데, 이는 왕이 대궐 안에서 자주 활쏘기를 구경하면서 경연을 여려 차례 정지시켰기 때문이었다. 8월 각 도의 관찰사에게 유시하여 효자(孝子)·순손(順孫)·의부(義夫)·절부(節婦)와 공평, 청렴하고 현저히 공적이 있는 수령을 상세히 기록하여 알리도록 하였는데, 이는 그들을 발탁, 등용하여 권장하기 위해서이었다. 보루각(報漏閣)을 수리하고 《고려사》를 인쇄, 반포하였다. 12월 각 도의 관찰사에게 유시하여, 둔전(屯田)설치계획을 수립하여 알리도록 하였다. 1455년 윤6월 수양대군이 조정의 제신들과 의논하여 왕의 측근인 금성대군(錦城大君) 이하의 여러 종친·궁인 및 신하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 각 지방에 유배시키기를 청하자, 하는 수 없이 그대로 따랐다. 1455년 단종을 보필하는 중신(重臣)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던 한명회(韓明澮) ·권람(權擥) 등이 강요하여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어 수강궁(壽康宮)으로 옮겨 살았다. 1456년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응부(兪應孚) ·유성원(柳誠源) 등이 단종의 복위(復位)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모두 처형된 후 1457년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강원도 영월(寧越)에 유배되었다. 그런데 수양대군의 동생이며 노산군의 숙부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다시 경상도의 순흥(順興)에서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사사(賜死)되자 노산군은 다시 강등이 되어 서인(庶人)이 되었으며, 끈질기게 자살을 강요당하여 1457년(세조 3) 12월 24일에 영월에서 죽었다. 단종복위운동을 하다가 죽음을 당한 성삼문 등의 6명을 사육신(死六臣)이라 하고, 수양대군의 왕위찬탈(王位簒奪)을 분개하여 한평생을 죄인으로 자처(自處)한 김시습(金時習) 등 6명을 생육신(生六臣)이라 한다. 단종의 억울한 죽음과 강봉(降封)은 200여 년 후인 1681년(숙종 7) 신원(伸寃)되어서 대군(大君)에 추봉(追封)되었으며, 1698년(숙종 24) 임금으로 복위되어 묘호(廟號)를 단종이라 하였다. 능은 단종이 목숨을 끊은 강원도 영월의 장릉(莊陵)이다. |